전체메뉴

지명유래

부전동(釜田洞)

  • 부전동(釜田洞)은 조선시대의 경우 동래부 동평면 부현리(釜峴里)에 속하였다. 그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는데, 그중 하나는 부다대현(釜多大峴)이라는 것이며, 또 다른 하나는 지금의 당감동 즉, 감물리에서 지금의 부암로터리 밑인 고대리로 난 고개까지라는 설이 있다. 이 외에도 오늘날의 하마정에서 송상현 동상까지 마비현(馬飛峴)의 별칭이라는 설이다. 이중에서 부다대현은 부산포에서 다대포로 넘어가기 위해 넘는 고개로 위치상 합당치 못하며, 마비현은 광복 이후까지도 모너머고개 머나머고개로 불리어 왔다. 따라서 부현리의 지명은 감물리에서 고대리로 넘어가는 고개인 현 당감동 입구인 부암고개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이 고개에는 바위가 있었는데, 이 바위가 마치 가마솥〔釜〕을 거꾸로 엎어놓은 것 같은 형상을 하고 있어 부현〔가마고개〕이란 지명이 붙여진 것 같다. 이중 부현고개 아래의 범전리·전포리와 인접하는 곳을 부전이라 이름 붙인 것으로 추측된다. 공식적인 명칭으로 사용된 것은 1936년 시·구명 정비 때 부전동이란 이름이 쓰여지게 되었고, 1938년 부전동을 부전1,2동으로 분동하였으며, 1954년 부전1동에서 부전3동이 분동 되었다가, 1959년 부전3동을 부전1동에 통합하였고, 2015년 1월 1일 범전동을 부전1동에 통합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

범전동(凡田洞)(법정동만 유지, 행정동은 부전1동으로 편입)

  • 범전동(凡田洞)은 조선시대 동래부의 서면 범전리였다. 범전이란 명칭은 오래전부터 사용되어 오던 명칭이다. 이곳에 조개무지(패총)의 흔적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선사시대부터 주거가 형성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범전이라는 명칭은 초읍동의 금용산(일명 쇠미산)에서 발원하는 범천(凡川)의 가장자리인 평지로서 논이 펼쳐져 있어 붙여진 이름으로 보인다.『동래부지(1740)』의 이정조에 의하면, ‘연지리, 전포리, 범전리 등이 모두 동래읍성에서 같은 방향으로 11리’라고 말하고 있다. 이로 볼 때 세 마을은 인접하여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지금의 양성초등학교가 있는 산을 기점으로 하여 산 아래의 중심이 되는 마을을 범전동이라 하고 좌우를 각각 전포동과 연지동으로 불렀던 것이다. 1936년 동래군 서면 범전리에서 부산부 서면에 편입되었다가, 1957년 구제실시로 부산진구 범전동으로 편입된 이후 2015년 1월 1일부로 부전동에 편입되었다.

연지동(蓮池洞)

  • 연지동(蓮池洞)에는 연못이 있었는데 지금의 연지초등학교 자리이다. 이 못은 조선시대에는 신지언(新池堰)이라 불렀다. 1740년에 간행한『동래부지』에 산천조에 보면, “신지언은 동래부의 서쪽 13리에 있는데 길이는 2백 68척 넓이는 2백 24척이라”하여 동래부에서 둘째로 큰 제언(堤堰)으로 기록되어 있다. 연지라는 동명은 연못골에서 나온 이름으로 이곳 못에 연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나 조선시대는 이 못을 연지언이라 하지 않고 새못이란 뜻을 가진 신지언이라 하였다. 이는 당시 초읍동에 화지언이란 역사적으로 유래가 오래된 옛 못이 있었는데, 연지동의 못은 그후에 만들어진 새로운 못이라는 뜻에서 신지언이라고 이름 붙인 것으로 생각된다. 일제시기인 1947년 부산출장소 연지동으로 개칭되었다가, 1957년 연지동과 초읍동을 성지동으로 통합하였다. 1963년 인구증가로 성지동을 다시 초읍동과 연지동으로 분동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초읍동(草邑洞)

  • 초읍동(草邑洞)은 연지동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금정산의 남북으로 통하는 요충지로 북쪽으로 금용산을 등지고, 남으로는 연지를 지나 부산평야로, 동으로는 화지산이 서쪽으로 달려가는 형상의 작은 산맥으로 둘러싸여 있고, 서로는 산(쇠미산)의 산맥이 뻗어있어 천연의 성벽을 이루는 분지이다. 이곳의 동의 명칭이 초읍으로 된 연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동평현이 생긴 후 읍의 치소治所)를 물색하기 위해 명사들이 초읍동을 들러 보았는데, 산의 지세가 좋고 지리가 음양에 맞아 이곳을 우선 읍의 치소(治所)로 선정해 놓고 이보다 더 좋은 곳이 없나하여 현 금정구의 두구동으로 가보니 역시 산세가 좋아 두고 보자한 후 현 동래성에 들렀더니 동으로는 학소대와 남으로는 대조포란형(大鳥抱卵形)이 서울 장안의 산세와 같으므로 이곳을 읍지로 정하였다고 한다. 이리하여 먼저 초한 곳이란 뜻에서 초읍이라 명명하였다고 전한다. 그러나 이는 호사가들의 일담에 지나지 않고 실제는 새터가 원래의 고을 이름인 것으로 파악된다. 초읍은 초량을‘새뛰’라 부르는 것과 같이 초는 새로 읽히며 읍은 량·탁·벌·성 등의 터로 읽혀 '새터’로 불릴 수 있다. 새터는 새로운 터전, 새로운 자리라는 뜻이다. 즉, 동평현의 치소(治所)가 지금의 당감동 부근이었는데 고려후기 이후 빈번한 왜구들의 침입으로 동평현이 피폐해지자 천연의 요새인 이곳으로 이주하여 새로운 마을이란 뜻에서 새터 즉 초읍으로 불렀던 것으로 풀이된다. 초읍동은 조선후기 동래부 서면 초읍리에 속하였고, 그후 동래군으로 편제되었다. 1936년 부산부에 편입된 후 1942년 연지동과 함께 성지동으로 통합되었다가, 1963년 초읍동과 연지동으로 분동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양정동(楊亭洞)

  • 양정동(楊亭洞)은『동래부지(1740)』산천조에는 황령산 아래에서 화지산에 이르는 넓은 지역을 말하고 있다. 양정동은『동래부지(1740)』에는 양정리(羊亭里) 라 하였다. 양정(羊亭)이란 정자는 고적조나 루정(樓亭)조에 이름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정자(亭子)가 존재하지 않은 것으로 파악된다. 이 지역의 옛 어른들에 의하면, 양정본동 일대에는 수양버들의 실같은 가지가 바람에 하늘거리는 모습이 눈에 많이 띄었다고 하는데, 그래서 이곳을 버들 양(楊)으로 개칭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또 양정은 양지골에서 비롯되었다고도 한다. 이는 양정동에서 황령산을 바라보면 세 갈래 능선이 갈라져 나가고 있는데, 왼쪽은 당산능선, 중간은 평전(平田)능선, 우측은 취병장(吹兵場)능선이 뻗어 내리고 있다. 왼쪽 당산능선 아래쪽에 양지곡 골짜기가 있다. 양지는 음지의 응달에 비하여 양달이라 하여 햇빛이 많이 드는 땅이라는 뜻이다. 우리말의 양달은 양지의 음이 높아 한자의 양(羊)으로 표기되고 지(地)는 정자골(亭子谷)이 정자꼴로 읽히는 것으로 보아 정(亭)으로 된 것으로 풀이된다. 1970년 양정1,2동으로 분동하고, 1979년 양정1동을 양정1,3동으로, 양정2동을 양정2,4동으로 분동하였다. 1998년 양정3동을 양정1동에, 양정4동을 양정2동에 통합하였다.

전포동(田浦洞)

  • 서면의 동천이 지금 범일동과 문현동 사이로 흘러 바다로 들고 있다. 그러나 먼 옛날로 올라 갈수록 동천과 바다가 어우러지는 자리는 서면의 북쪽인 육지쪽으로 올라온 자리였다. 말하자면 바다가 지금의 서면의 육지 깊숙이 들어서 있었는데 홍수 때면 서면 주위의 산에서 쏟아지는 물이 토사를 실어내려 바다를 메워 육지를 만들어 갔다. 그렇게 메워진 자리가 갯가가 되고 논밭이 돼 간 것이다. 그 논밭으로는 벼와 보리, 채소들이 재배되었다. 지금은 전포동의 평지는 시가지가 돼 있지만 그때는 갯가의 밭인 밭개였다. 그 밭개가 밭 전(田) 갯 포(浦)의 전포리가 된 것이다. 이 지역의 고로들의 말에 의하면 옛날에는 전포동(田浦洞)의 노막리 또 농막리까지 조수가 들어 배가 많이 정박하였다고 한다. 1949년 전포1,2동으로 분동되었다가, 1970년 인구 증가로 전포1동은 전포1,3동으로 분동되었고, 1975년 전포2동은 전포2,4동으로 분동되었으며 1998년 전포2,4동을 전포2동으로 통합하였다가 2015년 1월 1일부로 전포1.3동을 전포1동으로 통합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부암동(釜岩洞)

  • 부암동(釜岩洞)은 부전동과 같이 조선시대에는 동평면 부현리에 속하였다. 동천의 상류인 백양산에서 발원하는 감물내를 중심으로 고대리(古代里)에서 옛 개성중학교의 언덕바지 산인 통칭 백양산 앞의 지역을 말한다. 감물내가 시작되는 곳은 조선시대 지명으로 당리이고, 하천이 넓어지기 시작한 곳이 감물리이며, 그 아래 지역을 고대리(古代里, 古垈里)라 하였다. 감물내의 고대리 아래지역을 모두 부현리(釜峴里)라 하였는데, 이 부현리가 오늘의 부암동과 부전동으로 분리되었다. 부전동은 감물내의 동쪽 중 전포·범전의 평지에 붙여진 이름인데 비하여, 부암동은 내 주변의 구릉, 바위동산이 흩어져 있어 바위 암(岩)자가 붙여진 것으로 고대리와 이 마을 북쪽에 뒷골이라는 자연마을이 있었던 지역으로 보인다. 1979년 시조례에 의해 부암1,2동으로 분동되었다가, 1982년 동평2동을 부암3동으로 행정명칭을 개편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98년 부암1,2동을 부암1동을 통합하였다.

당감동(堂甘洞)

  • 당감동(堂甘洞)은 금정산의 주맥인 백양산이 병풍처럼 둘러싸인 산록에 위치하여 있으며, 삼국시대의 동평현의 치소(治所)로 현재까지 동평현성이 남아있다. 당감동은『동래부지(1740)』방리조에 보이는 동평면의 당리(堂里)와 감물리(甘勿里)의 두 마을을 합쳐서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당감리라고 고쳐 부르게 됨으로서 생긴 동의 이름이다. 오늘날 당감동의 고무나무골에 수령이 오래된 고사목(枯死木)이 있었는데, 이 당산나무를 중심으로 동으로 직선을 그어 북쪽은 과거의 당리였고, 남쪽은 감물리였다고 한다. 당리라 한 것은 마을에 오래된 당집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으로 지금까지도 순조 25년(1825)에 세운 영숙사라는 신당이 남아 있다. 감물리가 변하여 감물이 되었다는 설과 신이라는 뜻의 검물내〔神川神水〕라는 설이 있다. 이로 견주어 볼 때 감물내는 부산천을 의미하는 고음이 아닐까 하는 추측도 낳게 한다. 당감동은 1914년 당감리에서 출발하여 1951년 당감1·2동으로 분동되었다가 1970년에 당감1동이 당감1동, 동평동으로 분동되었다. 1979년에는 당감1동이 당감1·3동으로 분동되었고, 동평동이 동평1·2동으로 분동되었다. 그리고 1982년에 동평1동이 당감4동으로, 동평2동이 부암3동으로 바뀌었다. 2013년 2월 1일부로 당감1,3동이 당감1동으로 통합되었다.

가야동(伽倻洞)

  • 가야동(伽倻洞)의 유래는『동래부지(1740)』방리조에 보면,“가야리는 동평면에 속한 지역으로 관문에서 20리 거리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가야라는 어휘의 뜻이 무엇인지는 아직 학계에서 정론을 얻지 못하고 있으나,『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는 6가야의 가야를 의미하는 것에서 유래되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옛날에는 지금의 고관, 즉 수정동으로부터 감고개를 넘어 가야동으로 왕래하였던 까닭에 이곳은 교통의 요충지에 해당되었다. 가야리란 명칭은 이 감고개 아래의 마을이란 뜻에서 생겨나지 않았을까 짐작된다. 1904년 경부선의 개통으로 동평면과 단절되고 대신 서면의 가야리로 되었다. 1903년 조선총독부에서 조사한 조선의 성에 의하면, 달성 서씨가 세거(世居:한곳에 대대로 살아 감)한 곳으로 알려져 있는데, 대체로 16대(代) 밖에 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임진왜란 전후에 이주해 온 것임을 추측할 수 있다. 1959년 개금동을 흡수하였다가, 1963년 다시 가야동과 개금동으로 분동하였다. 1970년 급격한 인구증가로 인해 가야1,2동으로 분동 되었다가, 1979년 가야2동을 다시 가야2,3동으로 분동하였으며 2013년 2월 1일부로 가야1,3동을 가야1동으로 통합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개금동(開琴洞)

  • 개금동(開琴洞)의 조선시대 행정명은 와요리(瓦要里)라 칭하다가 1904년 개금리라 칭한 것으로 보여진다. 가야리와 상대하여 경부철도 건너 북쪽에 있는 마을을 개금동이라 하였다. 이곳 고로들의 말에 의하면, 이 마을의 모양이 꼭 거문고가 길게 늘어져 있는 형상이라 하여 개금이라 했다고 한다. 또 임진왜란 당시 백성들이 토착지를 등지고 하염없이 피난길을 헤매던 어느 날 푸른 산림이 우거지고 맑은 냇물이 흐르는 아늑한 계곡이 뻗어 있는 이곳 어디에선가 들려오는 은은한 가야금 소리를 듣고, 바로 이곳이 장차 평화의 뿌리가 뻗어날 삶의 터전이라고 생각되어 전란의 시름을 달래면서 처음으로 마음놓고 거문고로 한 곡조를 타고 이곳에 정착하기로 결심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거문고를 말미암아 이곳에 살게 되었으므로 개금이란 지명이 붙었다고 한다. 이 마을에는 최씨, 배씨, 송씨 등이 오랫동안 거주했으며, 가장 오래된 경주 최씨도 18~19대 밖에 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임진왜란을 전후해서 생긴 것으로 보여진다. 개금동의 명칭이 1900년 이전의 읍지에는 나타나지 않고『동래군지(1937)』에 개금리가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일제시대부터 개금이라는 명칭이 사용된 것으로 보여진다. 1959년 가야동에 흡수되었다가, 1963년 가야동에서 분동되었고, 1975년 인구의 증가로 개금1,2동으로 분동되었다가, 1976년 개금1동에서 개금3동이 분동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범천동(凡川洞)

  • 범천(凡川)은 오늘날의 자성대를 사이에 두고 흐르는 강으로 동천(東川)이라 한다. 옛날에는 이 강을 풍만강(楓滿江)·보만강(寶滿江)이라 부르기도 하였는데, 그것은 풍만(豊滿)이라는 음이 변하여 생긴 이름이 아닌가 한다. 오늘날 동천을 범천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그것은 범천의 물줄기가 원래 자성대의 서쪽으로 흘러 바다에 유입되었는데, 자성대 부근의 매축 때 두 시내를 연결시켰기 때문이다. 동천이란 부산진성의 지성(支城)인 자성대 쪽에서 볼 때 성의 동편을 흐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범천은 증산(甑山)에 인접한 산들이 산세가 험하고 산림이 울창하여 호랑이가 서식하였는데, 호랑이가 이 계곡에서 자주 출몰하였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따라서 범천은 한자식으로 호천(虎川)이라고도 표기하였다. 따라서 범천동이라는 동명은 범내〔凡川〕에서 유래되어 범내골을 중심으로 그 인근의 지역을 지칭하는 동명이 되었다. 1957년 구제실시로 동구에 편입되었다가, 1959년 시조례에 의해 동구 범일4동을 부산진구에 편입시키면서 범천1,2,3동으로 개칭하였다. 1966년 범천2동이 범천2,4동으로 분동되었고, 1975년 남구의 신설로 범천3동은 남구에 편입되었다가, 1982년 문현5동에 편입되었다.

※ 참고사항

  • 행정동은 행정 운영의 편의를 위하여 설정한 행정구역으로서 주민 수의 증감에 따라 수시로 설치 또는 폐지된다. 이에 비하여 법정동은 대부분 1914년 시행된 행정구역 통폐합 때 정해진 것으로, 예로부터 전해온 고유 지명을 그 명칭으로 하며 거의 변동이 없다.
    다시말해 법정동의 의미는 이름 그대로 법으로 정한 동이라는 뜻이다. 반면 행정동은 행정편의를 위해 설정한 행정구역을 말한다. 다시 말해 법정동은 토지 주소, 신분증, 각종 권리 행사 등 법률행위에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동명이고, 행정동은 주민수의 증가난 감소에 따라 설정되는 행정상의 동명이다. 동주민센터(동사무소)가 설치되어 있는 것으로도 구분할 수 있다.
    즉 행정 능률과 주민의 편의를 위하여 그 지방자치단체의 조례로 정하는 바에 따라 하나의 법정동을 2개 이상의 행정동으로 운영하거나 2개 이상의 법정동을 하나의 행정동으로 운영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 담당부서 : 문화체육과
  • 담당자 : (☎ )
  • 최근수정일 : 2016.03.14
컨텐츠 평가 입력 폼
의견나누기
[108명 참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