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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령산봉수대

작성자관리자

작성일2013.09.06

조회수1360

황령산봉수대 1



?? 위 치 : 부산진구 전포동 산50-1번지
?? 설 치 연 대 : 1425년(세종 7)이전『( 경상도지리지』,『 세종실록지리지』)   
                      1898년까지 사용, 1976년 10월 1일 복원
??봉 화 구 : 넓이 1m×1m×5개, 높이 1m

 

봉수대(烽燧臺)는 고려시대 때부터 사용되어 온 중요한 통신시설로서 변경의 긴급한 정황을 중앙 또는 변경의 기지에 알리는 군사상 목적으로 설치하여 운용했던 것이다. 대략 수십 리 간격으로 후망( : 높은 곳에 올라가 멀리 살펴보며 경계함)의 요지가 되
는 산정에 봉수대(봉화대 또는 연대)를 두고 낮에는 연기를 피워 올리고 밤에는 불을 지펴 올렸다.
평시에는 일거(一炬), 적이 나타나면 이거(二炬), 적이 근접하면 삼거(三炬), 적이 침범하면 사거(四炬), 접전하면 오거(五炬)로 홰를 올리는데, 변경에서부터 순차적으로 서울로 연락했다.


봉수의 근본 노선을 직봉(直烽)이라 하여 동북은 경흥, 동남은 동래, 남북은 강계와 의주, 서남은 순천 등 5곳을 기점으로 하
고 서울의 목멱산(木覓山: 남산)을 종점으로 하였다. 이 외에 간봉(間烽)이라는 보조선이 있었는데 직봉과 직봉을 연결(장거리선)하거나 변경의 초소로부터 본진(本鎭)·본읍(本邑)을 연결(단거리선)해 주었다.


봉수대는 국가의 안위가 걸린 중대한 책무였으므로 수령(首領)이 봉수군 후망의 실태를 감독하고, 감시를 소홀히 하여 경계망에 구멍이 뚫리면 연대책임을 졌다. 조선시대에는 봉수망(烽燧網)이 부분적으로 여러 차례 정비되는 가운데 일부 봉수대가 자
리를 옮기기도 했다.


부산지방에는 일곱 곳에 봉수대가 있었는데 계명산과 황령산·간비오산·구봉·오해야·응봉·석성 봉수대가 그것이다. 그 중 오해야 봉수대는 영조 때 폐지되었고 석성 봉수대는 현종 때 구봉에 합쳐져 폐지되었으며 나머지 5개소가 영조 이후에도 계속 존치
되었다.


‘황령산봉수대(荒嶺山烽燧臺)’는 황령산 정상에 위치하여 동쪽으로는 해운대의 간비오산 봉수대, 북으로는 범어사 동북에 있는 계명산 봉수대와 연락하였다. 엄광산의 구봉봉수대는 동쪽으로 황령산 봉수대와 연락하였으며, 다대포의 두송산 응봉 봉수대는 동으로는 구봉, 서로는 김해·성화·예산 봉수대와 연락하였다. 계명산 봉수대는 남으로 황령산, 북으로는 양산의 원적산 봉수대와 연락하였고, 간비오산 봉수대는 북쪽으로 기장의 남산 봉수대, 서쪽으로는 황령산 봉수대와 연락하도록 하였다.


각 봉수대에는 도별장(道別將) 1인을 두고 그 밑에 별장(別將)·감고(勘考)·봉군(烽軍)을 두었는데 별장은 황령산·계명산 봉수대에 각 10인, 응봉·구봉·간비오산 봉수대에 각 6명을 두었다. 감고는 봉수대마다 각 1명을 두었고, 봉군은 각 100명씩 배치되어 있었다. 응봉 봉수대는 다대진, 구봉봉수대는 부산진, 간비오산 봉수대는 경상좌수영, 황령산·계명산 봉수대는 동래부에서 관리하였다. 황령산봉수대는 임진왜란 당시 왜적이 침입해 왔을 때 그 기능을 발휘한 바 있어, 그 당시우리의 국방의식을 돌이켜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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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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