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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흑백 사진 풍경 같은 마을을 서면에서 만났다
■ 노포만담-부암동 굴다리슈퍼
발행일20260527




"원래 하시던 어르신이 건강 때문에 가게를 그만두셨어요. 그때 제가 가게를 인수했는데 올해 9년째네요. 어르신이 한 30년 정도 가게를 운영하셨다고 알고 있어요. 그 전에 다른 분이 여기서 장사를 하셨다는데, 아마도 그렇게 치면 이 가게가 한 50년 가까이 되지 않겠어요?"
가게는 굴다리 바로 입구에 붙어 있다. 굴다리 옆에 붙은 가게라 굴다리 슈퍼'다. 말이 슈퍼지 동네 점빵 분위기다. 자그마한 2층 건물에 1층은 가게, 2층은 살림집으로 쓰고 있다. 마치 오래된 흑백 사진을 보는 듯한 낡고 오래된 풍경은 이곳이 서면이라는 것을 잊게 한다.
서면에서 만나는 호젓한 골목길 풍경
굴다리 슈퍼'는 부암동 철길마을 안에 있다. 철도와 고가도로가 지나가는 마을로 들어가려면 대부분 굴다리를 통과해야 한다. 굴다리 철길마을도 그렇다. 굴다리는 부전1동과 부암1동을 가르는 경계다. 경계 안에는 빛과 어둠이 공존한다. 굴다리 안은 어둠의 공간이다. 어둠의 저편, 굴다리 밖은 빛의 세계다.서면 번화가를 조금 벗어났을 뿐인데, 걸어서 10분 거리에 굴다리 너머로 펼쳐지는 풍경은 방금 전까지 본 화려함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다.굴다리는 낮고 좁다. 승용차나 소형 트럭 한 대 겨우 지나다닐 정도다. 버스나 큰 차는 엄두도 못 낸다. 그래서 이 구간은 일방통행이다. 속도도 내지 못해서 굴다리 슈퍼는 마치 쉬어가는 페이지' 같다.
3면이 다 막다른 골목
마을 안은 좁은 골목이 미로처럼 이어지지만 결국은 막다른 골목과 만난다. 가야선과 동해선, 부전선 철길이 마을을 삼각형으로 에워싸고 있다. 그래서 부암동 철길마을을 드나들 수 있는 통로는 굴다리 세 군데다. 마치 천혜의 요새 같다.
"여길 지나다니는 분들은 대부분 마을 주민들이죠. 외출하려면 어차피 지하철이나 교통편이 서면 쪽이 많으니까 여기를 지나가는 게 편하죠."
결혼 후 들어와 여기서 신접살림을 차리고 눌러산 것이 벌써 23년째라는 굴다리 슈퍼 사장이 가게 밖에 나와서는 말을 전한다.마을은 한가하고 조용하다. 굴다리 위로는 기차가 덜컹거리며 지나가고, 외출하고 돌아오는 차림의 사람들이 굴다리를 빠져나와 불현듯 생각난 듯 굴다리 슈퍼로 들어가는 모습은 일상처럼 자연스럽다.이런 모습을 안도현 시인은 "지아비가 끌고 지어미가 미는 과일 손수레도/ 밝은 세상 가자고 부지런히 삐거덕거린다/ 징징거리며 앞지르는 오토바이, 막노동꾼과 공무원도/ 단발머리 여학생 몇몇과 노인도 모두 섞이어/ 간다, 이렇게들 수십 년 지나갔으므로/ 역사는 기록될 수 있었다"라며 굴다리를 오가는 서민들의 일상과 삶을 노래했다. -이리역 굴다리 중에서-
피난수도 부산 흔적 간직한 마을
부암동 철길마을이 지금의 모습으로 자리 잡은 것은 한국전쟁 이후로 추정한다. 부산으로 몰려든 피란민들은 빈 땅이면 어디든 판잣집을 지었던 시절이다. 철길 옆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게다가 중학교가 있다면?마을 한복판에 위치한 서면중학교는 부암동 철길마을의 역사를 가늠할 수 있는 단서다.서면중학교는 1948년에 성지중학교로 개교했다. 1976년에 서면중학교로 이름을 바꿨다. 굴다리 슈퍼 쪽에 있는 단층 건물이 1953년에 지은 교사(校舍)고, 현재 사용 중인 4층 건물은 1966년에 지었다. 둘 다 근대문화유산급으로 오래된 건물들이다. 올해 75회 졸업생을 배출한다.세월이 흐르면서 부암동 철길마을 판잣집들이 슬래브 지붕으로, 2층 주택으로, 다세대 주택으로 바뀌었지만 서면중학교 담장과 철도를 따라서 형성된 골목의 선은 거의 그대로다. 마을은 피난수도 부산의 흔적이다.
그냥 거기, 그렇게 있었던 것처럼
그냥 거기 있었다는 것. 굴다리 슈퍼가 그렇다. 그 시각에 기차가 지나가듯 슈퍼는 그냥 오늘도 문을 열었고, 내일도 열 것이고, 그게 전부다.기차가 지나갈 때 기찻길 옆의 집 창문은 흔들릴 것이고, 밤이면 기차 소리에 잠을 설치기도 할 것이다.이제는 아무도 두레박으로 물을 길어 올리지 않는 골목 안의 마을 공동 우물처럼 골목 담벼락에는 세월의 흔적이 켜켜이 쌓여만 간다.
백화점과 지하상가, 먹자골목, 화려한 불빛들… 도시가 보여주고 싶은 얼굴이다. 서면은 이런 얼굴로 기억되고 싶은 지도 모른다.그렇지만 부암동 철길마을과 굴다리 슈퍼는 서면의 화려함 뒤에 감춰진, 지금껏 몰랐던 서면의 또 다른 얼굴이다. 도심 번화가에서 10분 거리에 1,000걸음도 되지 않는 곳에 이런 공간이 있다니!부암동 철길마을과 굴다리 슈퍼는 서면의 속살을 지키는 것들이다. 그렇기에 도시가 숨겨 놓은 다양한 얼굴과 흥미로운 스토리를 찾아가는 여정은 즐겁다. 글. 원성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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